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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여사의 생애
육영수 여사는 1925년 옥천군 옥천읍 교동리에서 아버지 육종관 씨와 어머니 이경령 여사 사이에서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형제는 오빠인 육인수, 언니 육인순, 동생 육예수가 있었다. 육영수 여사가 태어나기 전 어머니 이경령 여사께서 꿈을 꾸셨는데 마당 안의 연못에서 큼직한 자라가 기어 나와 이경령 여사의 품에 덥석 안기는 바람에 엉겁결에 두 팔로 자라를 품에 안았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가 태어나신 교동집은 삼정습이라고 불렸다.
이 집은 1600년대 김정승에 이어 송정승, 그리고 민정승이 살던 300년 이상 묵은 고가로서 옥천군 청성면 능월리에서 살던 아버지 육종관 씨는 1920년 당시로는 막대한 금액인 이만오백 원의 돈을 주고 이 집을 사서 1921년 이른 봄 이곳으로 이사해 왔다.
아버지가 소문난 부호로 부유한 가정에 있었으나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고 온유한 성품을 지녔다. 옥천읍내 죽향국민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배화여고를 졸업한 뒤 옥천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50년 전란으로 부산에 피난중일 때 육군중령 박정희와 혼인하여 슬하에 지만, 근혜, 근영 등 1남 2녀를 두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이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하여 성공한 뒤 1963년 10.15 총선거에서 6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여임 됨에 따라 대통령 부인으로 11년간 내조하였다. 검소한 안 살림과 우아한 품위로 대외적인 활약을 하였으며, 숨어서 남이 못하는 일을 많이 하여 덕망을 쌓았다.
만년의 공직은 양지회 명예회장과 자연보존협의 총재였으나 평소 재야 여론을 수렴하여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를 계속하는 가운데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는 말도 들었다. 남산에 어린이 회관을 설립하는가 하면, 서울 구의동 일대에 어린이 대공원을 조성하고 정수 기술직업훈련원 설립을 비롯하여 재해대책기름조성과 정신박약아 돕기 운동 등 그늘진 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사회복지사업에 분망 한 일과를 보내었다.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 창간과 서울대학교 기숙사 정영사를 건립하였다. 경향 각처의 여성회관 건립은 물론 연말마다 고아원, 양로원을 위문하여 따뜻한 구호의 손길을 미쳤고, 1969년부터 전국에 87개소나 되는 음성나환자 정착촌을 만들어 재생의 길을 터주었다.
세계적인 영부인으로서 또한 국모로서 부족함이 없는 너무나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육영수 여사는 1974년 8.15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제29년 광복절 기념식장 단상에서 박정희 대통령께서 경축사를 하시던 중 북한의 지령을 받은 저격범 문세광이 쏜 총탄에 머리 관통 사을 입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5시간이 넘는 수술 끝에 생을 마쳤다.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에 희생양이 된 격이어서 애도 인파다 청와대에 연일 쇄도하였는데 국민장 영결식이 8월 19일 오전 10시 중앙청 광장에서 각국 조문사절과 내외인사 3,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에 거행되고 이날 오후 국립묘지에서 안장되었다. 그는 우리 시대가 낳은 훌륭한 어머니와 아내로서 이상적인 한국의 여인상을 국민의 가슴속에 심어 놓고 간 것이다.
육영수 여사의 동상은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 여성회관 옆에 건립되었다. 이곳에서는 매년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 8월 15일 기하여 지역주민과 유족, 박사모 회원들과, 정수장학회 관계자, 박정희 대통령 고향분들께서 찾아와 추모행사를 가지고 있으며, 11월 29일에는 탄신일을 기념하는 숭모제를 개최하고 있다.
한 나라의 대통령 영부인이라는 최고의 지위에 있으면서 항상 소박하고 성실하 내조자로서 한국 주부상을 내외에 과시하고 나머지 삶의 시간 전부를 이 땅의 가엾은 동포들을 위한 사랑과 봉사에 바치다가 간 육영수의 죽음은 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고귀한 죽음이었던 것이다.
구읍의 한옥 '교동집' 생가
"옥천 구읍의 한옥 '교동집'은 육 여사가 나고 자란 집이다. 허물어진 채 생가 터만 남았다가 복원을 마치고 2011년 5월부터 일반에게 공개됐다. 이 집은 조선 중기, 1600년대 김정승이 처음 지어 살고 이후 송정승, 민정승 등 삼정승이 살았던 집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삼정승이 살았다 하여 "삼정승집"이라 불리었던 이 집은 육 여사가 태어나기 전인 1918년 부친 육종관이 민정승의 자손 민영기에게 사들여 고쳐 지으면서 조선 후기 충청도 반가의 전형적 양식의 집으로 탈바꿈했다. 육영수생가는 1974년 육 여사 서거 이후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생가는 폐가의 길을 걷는다. 육여사 서거 후 네 해째.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방치되어 오다가 1999년 유족들이 건물을 정말 철거하면서 생가는 기단과 초석과 함께 터만 남게 된다. 이후 옥천군에서 2000년 9월, 육영수여사 생가 복원계획을 세우고, 민간이 주체가 된 "육영수 여사 생가복원추진위원회"를 발족하여 육 여사의 회고에 근거하여 2002년 생가지 지표조사를 마친 다음 2003년부터 2010년까지 37억 5천만 원을 들여 건물 13동을 복원했다.
초서로 한일(ㅡ) 자를 쓰려면 옆으로 힘차게 가로 그어 가다가 붓에 힘을 모아 멈추는 잠두에서 아래로 내리 뻗치는 그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정기가 모인 아늑한 양지받이에 터를 잡은 교동집은 풍수지리학 상 명당에 자리 잡은 집으로 알려져 왔다. 집의 후원과 과수원을 합치면 26.400㎡에 대지 10,000㎡ 규모의 집이니 규모면에서도 보통의 집 수준을 넘어선다. 아흔아홉 칸의 집이었다는 이야기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생가는 육영수여사의 회고에 의하여 건물의 배치를 살펴보면, 솟을대문을 들어서서 오른편으로 마방이 있고, 대문과 마주 보는 곳이 사랑채였다 한다. 사랑채 왼쪽에 건너 채가 있었고, 사랑채를 돌아 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채가 지처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안채에서 왼쪽으로 행랑, 오른편으로 연당사랑, 뒤로 돌아 별당, 후원에 사당과 정가 있었다고 한다. 정자 오른쪽에 또 뒤채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바깥겹집 사랑채만 하여도 누마루, 바깥 사랑방, 안 사랑방, 사랑채 안방, 대청, 광, 다락, 식객들이 거처하는 방, 사랑채 전용부엌 등 당시로는 상류층의 규모 있는 살림집이었다고 한다.
생가에 가면 사랑채와 'ㄷ'자형의 안채에 설최된 전통창호를 유심히 살필 일이다. 용(用) 자살창과 아(亞) 자살창, 완 자살창 등 사대부 집 방의 창호를 장식하는 살대가 그려내는 문양이 고고하기도 하면서 아름답기도 한 멋이 깃든 전통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충북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119 (옥천읍 교동리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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