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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한국인의 애송시 '향수'의 시인, 정지용의 생애
시인. 옥천읍 하계리에 출생하였다. 본관은 영일 정 씨.
1923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처, 1929년 일본 경도의 동지사대학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그 직후부터 귀국하여 모교의 교원으로 재직하였고, 1945년 광복 후에는 경향신문 편집국장,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나 조선문학동맹에 가입하였으며, 그 중앙집행위원에 선입되었으나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전향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
충북 옥천읍에서 북동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곳에 곧게 뻗어 나간 산줄기, 일자산이 있다. 이산의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실개천을 이루고 있는데, 이 개천을 건너는 다리가 청석교이다. 정지용은 1902년 6월 20일, 이 다리 바로 옆에 있는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연일 정 씨 태국을 아버지로 하고, 하동 정 씨 미하를 어머니로 하여 4대 독자로 태어났다.
정지용의 아명은 지용이었다. 이 이름은 지용의 어머니가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꾼 데서 비롯되었으며, 본명은 이 음을 취해 지용을 지었다는 것이다.
4대 독자인 데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방랑생활을 했으니. 그에게 거는 어머니의 기대는 더욱 컸으리라. 그의 부친은 한때 중국과 만주를 방랑하며 한의술을 배웠고, 고향에 돌아와 한의업을 개업하여 재산을 꽤 모았으나, 어느 해 밀어닥친 홍수의 피해로 가게가 갑자기 기울어 가난했다고 한다. 원래 연일 정 씨들이 집단촌을 이루며 살던 곳은 충북 옥천 수북리 꾀꼴 마을이었는데, 그 본고장에서 살지 못하고 하계리 개천사로 이사를 온 것이다. 그때 지용의 부친은 처가 친척인 송지헌의 농장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지용은 "나는 소년적 고독하고 슬프고 원통한 기억이 진저리가 나도록 싫어진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4대 독자로서 느껴야 했던 숙명적 고독감과 부친의 방랑과 실패, 가난 등으로 어린 지용은 불행했다.
정지용은 17세에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휘문고보는 성적이 우수하고 형편이 어려운 그에게 재학시절에 장학금을 주었고, 졸업 후에도 유학 비용을 부담했다. 유학을 마치고 모교에서 영어 교사로 16년간 재직하였으나 지용은 통산 27년간 휘문과 관계를 맺은 셈이다.
휘문보고 1학년 때부터 문예활동을 시작한 지용은 그의 발안으로 명명된 동인지 「요람」의 산파역을 맡으며 습작활동을 시작했다. 「요람」의 동인은 고보와 전문학교 학생들로, 지용과 박제찬, 박팔양, 김화산 등이며, 지용이 간부로 있는 휘문고보의 등사기를 이용해서 제작하였다. 지용은「요람」에「정지용시집」 3부에 수록된 동시의 절반 이상을 발표했으며, 2학년 때는「서광」지에「3인」이라는 소설도 발표하여 일찍부터 문재를 발휘하고 있었다.
정지용은 1929년 3월 도시샤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9월에 모교 영어 교사로 취임했다. 취임 후 곧 분가하여 종로레 살림을 차렸다. 기나긴 타국, 타향살이를 끝내고 마침애 가정이라는 안정된 보금자리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다. 그는 12세 때 은진 송 재숙과 결혼했지만 15년간이나 헤어져 살았다. 장남 구관도 27세 때 얻을 수 있었다. 지용은 이제 학생에서 교사로, 하숙생에서 한 집안의 어엿한 가장이 된 것이다.
정지용은 해방 직후 모교의 교사직을 사직하고 이화 여전 교수로 취임했다. 해방 후 그는 거의 시를 쓰지 못했다.
5년 동안 시「곡마단」과 기념 시 2편과 시조 5수 이외에는 작품이 없다. 당시 좌우익으로 대립되어 사회가 극도로 혼란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진로와 장래가 불투명한 정치상황에서 그는 방황했던 것이다.
1950년 6.25 사변 때 서울에 있다가 북괴군에 끌려나가 문화선무대에 참여했다고 하며 그 뒤 소식이 끊겼다. 1953년 전후에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996년 생가 곁에 정지용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1996년 원형대로 복원되어 관리되고 있는 정지용 생가 곁에 정지용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이 문학관은 정지용 문학의 실체를 보고, 느끼고,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문학전시실과 영상실, 문학교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문학관을 들어서면 전시실로 들어가는 입구 로비에서 정지용의 밀랍인형이 벤치에 앉아 관람객을 맞이한다.
인형의 뒤에는 고향풍경의 벽화가 있고, 벤치의 가운데 정지용이 앉아 있으니 들어오는 사람들 마다 양 옆에 앉아서 기념촬영을 하는 명소가 되었다.
잊혀져가는 우리 고향의 정경을 오롯이 그려낸 국민시인 정지용. 일제강점기는 그에게 친일 시인이라는 누명을 씌우기도 했으며 해방 후 좌우익대립의 혼돈은 그를 방황케 했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는 아예 그를 월북시인으로 낙인찍어 그와 그의 문학을 묻어버렸다. 전혀 원하지 않았건만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역사의 폭력을 감내해야만 했던 우리 민족. 그의 생애 속에서 질곡스런 우리 역사가 배어 나온다.
동선을 따라 좌측으로 이어진 벽면을 장식한 지용문학지도는 '한국현대시의 흐름과 정지용'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191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현대시가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되었는가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그러한 시문학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정지용 시인이 차지하는 비중을 알아볼 수 있다. 이후 1974년에 헐린 그의 생가가 있던 자리에 지어진 집에 조그만 청동의 표지판이 이곳이 그곳이었음을 조용히 알리던 때를 지나 그곳에 1996년도에 원래의 모습으로 그의 생가는 복원되었다. 그리고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 2005년 5월 그의 생애와 문학을 총 망라한 기념관이 세워지게 되어 그의 발자취와 생애, 문학을 한자리에서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곳에 가면 온전한 시인 정지용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틀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짓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구읍이다.
옥천역이 설치되기 전에는 옥천의 중심지였으나 옥천역이 들어서고 나서 그 주변이 옥천의 중심지로 발전되니 구읍의 경제는 세월의 변천에 따라 쇠락하고 마을로 변모하여 "옛 구자"를 더하여 구읍이다. 구읍은 이제 정지용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고 바로 곁에 있는 생가의 툇마루에 걸터앉아 그의 문학의 향기를 음미할 수 있는 명소를 갖게 되었다.
옥천의 구읍은 옛날의 영화를 말하 듯, 일제강점기 건물과 미국식 교회당, 개량민가 등 근대건축물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며 문화유산도 곳곳에 있다.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만 들르고 떠난다면 구읍은 섭섭할 터, 구읍의 근대건물과 문화유산의 향기를 흠뻑 느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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